세상의 일이란 인간은 잘 알 수없는 강력한 힘에 의해 처음부터(범위가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그 길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것은 운명론이자 결정론이다. 물론 난 그걸 부정하는 사람이지만 의외로 그런 걸 믿는 사람은 무척 많다.
게다가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중엔 그런 걸 믿는 사람들을 이용해서 밥벌이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역시 무척 재미있는 일이다.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것이 점을 보는 사람들이다. 익히 잘 알려진 것처럼 이들은 실제로 운명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의 심리를 잘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술을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배운다는 콜드리딩의 기법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을 조작내지는 유도하는 행위다. 대체로 인간은 암시에 약하기 때문에 콜드리딩의 경우 성공확률이 높은 편이다.(최면도 실은 암시의 효과다) 그리고 이걸 조금 심각한 쪽으로 이용하는 이들이 바로 종교인들이다.
그래도 사실 이 정도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즐거움을 주고 어느 정도의 수고비를 받는다는 건 여타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까. 문제는 이런 것을 통해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행위다. 타인의 심리를 조작하여 믿음감을 심어준 다음 그것을 통해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지만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범죄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발적인 행위였다다는 이유로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예전에 그랬다. 그러나 최근엔 그런 행위를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똑똑한 줄 안다. 그런데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 똑똑한 편이 아니다. 특히 암시나 의도에 대한 부분에 대해선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치리기가 쉽지 않다. 그 단순한 사례.
얼마전에 SBS의 예능프로그램인 런닝맨에서 '운명의 짝을 찾아라'라는 편이 방송된 적이 있다. 물론 운명의 짝이라는 건 그저 출연자들을 속이기 위한 반전의 장치로 도입된 것일 뿐 실제론 학교괴담을 다룬 일종의 납량특집이었다. 때문에 운명의 짝을 찾을 수 있도록 각 출연자들에게 준비했다는 소도구들은 사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다. 심지어 그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지정받은 방과 그 방에 걸린 문패들 '모벙생의 방, '선도부의 방', '소녀의 방' 같은 것들도 아무 의미없는 것이었다.
이런 장치들이 반전을 위해 잘 준비된 장치들인지 아니면 그냥 제작진이 무심하게 가져다 놓은 소품들에 불과한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의도가 어떤 것인가와는 상관없이 이 장치들은 출연자들에게 강력한 암시를 주는 훌륭한 장치로 기능했다. 소녀와 어떤 역할이 더 잘 어울리는가에 대해서 서로 열을 올리는가 하면 자신들이 맞춰봐야 하는 물건들중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과 잘 어울리는가에 대해서도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비록 웃자고 하는 말들이지만 그들의 주장이 다들 나름의 합당한 이유를 달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소녀는 꽃미남, 선도부, 오락부장, 꼴찌 그 누구와 연결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으며 거꾸로 그 누구와 관련이 없다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즉 그들사이엔 사실 아무런 별다른 연관관계, 특히 '당연히 그렇게 연결되어야만 한다'는 운명적인 관련같은 건 전혀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가 더 큰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왜 그럴까? 이들에겐 운명의 짝을 찾아야 하는 미션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즉 운명같은 결정론적 가치이전에 미션이 먼저 존재했다. 그렇다고 다음 자리가 운명인 것도 아니다. 미션 다음 자리는 서로의 역할과 각자에게 주어진 물건들 간의 연관관계가 차지하고 있다. 역할과 물건이 서로 맞아 떨어져야 서로가 운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운명은 그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미션이라는 큰 틀안에서 역할과 물건의 연관관계라는 소소한 연결고리들이 맞춰져야지만 비로서 등장하는 초라한 역할이 되어버린 셈인데 재미있는 건 이게 단순히 TV예능 프로그램의 설정에 불과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는 점이다.
사실 가장 재미있는 건 이 관계를 거꾸로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첫 눈에 반했기 때문에 당신의 나의 운명'라는 말은 그 안에 전혀 다른 질문을 갖고 있다. '나는 어떻게 당신과 같은 사람에게 첫눈에 반하는 취향을 갖게 된 것일까?' 아니면 '왜 나는 그토록 자주 첫 눈에 반하는 성격을 갖게된 것일까?'
운명이나 소명같은 안대를 벗어 버리면 거기엔 자신과 사람들과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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