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스포일러'는 비난의 대상이다. 뭐 그렇다고 그걸 고자질쟁이니 뭐니 하는 식으로 아무 데나 갖다 붙이며 말을 만들어대는 반편들보다는 낫다. 스포일러는 적어도 있는 사실을 말하지만 분별력없는 반편들은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니까.
뭐 그래도 스포일러는 일반적으로 비난을 받는다. 그런데 난 간혹 생각한다. 그게 그렇게 비난받을 일일까? 최근에 EBS에서 EIDF, Ebs International Documentary Festival(맞나?)을 해준다. 저번 주 일요일 저녁엔 '나는 암살당할 것이다'라는 다큐멘터리를 상영해 주었다. 불행하게도 그 다큐멘터리가 시작하고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난 이 다큐멘터리의 결론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아 차렸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주장이 있다. 그리고 그 일방적인 주장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증명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건 일종의 증명 과정일 수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일방적인 주장'이라는 점, 증명이라는 것 역시 그 일방적인 주장속에 포함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증명이 증명으로서의 가치를 갖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죽음으로 무언가를 중명한다는 것이 정서적으로 다소 강력하게 다가온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일방적인 주장안에서 있다는 점만으로도 현저한게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을 이미 알아 버렸기 때문에 이 다큐멘터리가 재미가 없었을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결론을 눈치챈 이후 내 관심사는 '그렇다면 왜 저 사람은 저런 극단적인 방식의 증명이란 걸 하려고 한 것일까?'가 내 관심사가 되었다. 다큐멘터리이긴 하지만 다소 영화적인 요소들을 차용한 듯한 구성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꽤 잘 만든 스릴러 영화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결론을 알았지만 그 결론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 재미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결말을 말면 재미가 없다'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TV드라마의 결말을 몰라서 우리가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는 건 아니지 않은가? TV로 방영되는 정형화된 드라마들중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로맨틱 코미디들, 그 드라마들의 결론이 어떨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없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재미있게 본다. 심지어 자칭 '폐인'이란 현상까지 나타난다. 심지어 눈에서 레이저쏘고 귀신들이 마구 등장하는 드라마도 시청율은 좋다. 사람들은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지 결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고로 '결론을 알면 재미가 없다'는 말의 보다 정확한 의미는 '난 영화를 보는 방법, 영화를 보며 재미를 느끼는 단 한가지 방법만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란 고백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게 당신의 능력부족 탓이란 거다. 내 말을 듣고 화가 날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틀린 말은 아니다.
살면서 각종 영화 혹은 드라마들을 보다보면 새로운 형식의 영화들을 접할 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미 결론을 알려주고 시작하는 영화'란 방식은 그리 새롭지도 않다. 즉 결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그런 결론이 나게 되었는가?'를 추적하는 방식의 영화는 꽤 많다는 건데 불행히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결론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극단주의자들의 시각에선 그런 영화들은 그저 잘못 만든 영화이며 재미없는 영화에 불과할 것이다.
스스로 다양한 재미를 포기하겠다는 완고한 자세인데 글쎄다 그런 삶이 재미있을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그런 고루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일 게다. 만약 그런 사실을 인지한다면 꽤 괴로울 텐데 모르면 아무 문제도 아니니까. '알면서도 못하는 것'보다는 '모르고 안 하는 편'이 헐씬 더 마음은 편한 법이다.
다만 한 가지 권하고 싶은 삶의 자세가 있다면 그런 성향을 너무 자신있게 드러내지는 말라는 거다. 완고하고 고루한 것이 도덕적, 윤리적, 공동체적 가치에 투영되는 건 그나마 괜찮은 편이지만 각종 편향이나 개인적 취향을 대상으로 삼으면 그야말로 극단주의가 될 뿐이니까.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극단주의들, 인종차별주의자. 극우 파시스트들, 여성비하론자들이 바로 그런 예들이다. 물론 그들에겐 다행스럽고 나에겐 불행하게도 그들은 자기가 그런 사람이란 걸 모른다.
물론 이건 어느 정도 비약이다. 고작 영화의 결말을 까뒤집는 스포일러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교학사 교과서 저자들같은 극우 파시스트들,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찬양하며 민주주의 국가의 근간을 무너뜨린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인간을 영웅이라 찬양하는 무리들과 한 통속이라고 말하는 건 분명 무리한 시도니까.
그런데 내가 자주 하는 말중의 하나지만 그런 것들 사이의 거리는 고작 종잇장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거지.
P.S.
트위터같은 SNS때문에 대선이 영향을 받진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난 그 주장에 별로 동의해줄 생각 없다. 그런 주장은 투표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정확한 논리적 추론을 할 수 있는 자주적인 존재라는 배경을 깔고 있다. 그런데 현실이 과연 그런가? 정확한 건 아니지만 내 경험상 보자면 사람을 100명정도 모아 놓으면 그중에 1명정도 있을 거다.
나머지? 나머지들은 그게 무엇인지조차 잘 모른다. 그들 대부분은 그냥 주변 사람들과 별 탈없고 별 문제없이 살 수만 있다면 그 곳이 지옥이라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을 사람들이다. 그런 성향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나쁜 부분도 있다. 주변 분위기나 여론에 쉽게 휩쓸린다는 거다.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각종 여론 조작 매체들에 취약할 수 밖에 없는데 트위터를 비롯한 각종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들 역시 여론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밖에 없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글의 마지막 문장의 '종잇장 한 장차이'가 무엇을 위미하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독일에서 나치가 정권을 잡은 것도 그래서다. 그 당시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의 인종 차별주의나 전쟁같은 주장들에 다 동의했을까? 아니 대부분은 그런 것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분위기가 그렇게 흐르고 주변 사람들도 히틀러를 칭찬하는 말을 하니까 그냥 그런 줄 알았던 거다. 그 주변 사람들이 히틀러에 대해서 하는 말이 옳은 것인지 근거가 있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타당한지는 아무도, 그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고.
P.S.2.
아! 참고로 이 글은 최근 상영을 시작한, 그리고 홍보용 트레일러만 봐도 돈 더 내고 3D내지는 아이맥스 정도 가주셔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란 거만함을 내뿜어주는, 그래서 난 볼 생각이 별로 없는 영화 '그래비티'에 대한 감상문에 스포일러가 있다며 광분하는, 심지어 별 연관도 없는 포탈 사이트 순위 매기기란 어처구니없는 결론까지 내놓고 득의양양해 하는 어느 이름모를 반편들을 위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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