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화, 그러니까 혁명이든 개혁이든 퇴행이든 종류를 불문하고 '변화가 완결되었다'라는 것은 과연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것일까? 지배양식의 변화? 생산양식의 변화?
개인적으로 난 '완결'이란 조건을 전제로 하자면 '존재양식의 변화'를 들고 싶다. 즉 한 사람의 삶처럼 구체적인 행위를 규정하고 추동하는 가치관의 변화야말로 '변화의 완결'이라고 보는 편이다.
'지배양식'이나 '생산양식' 역시 결국 존재양식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둘이 존재양식보다 덜 중요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완결을 규정하는 것은 존재양식일지 모르지만 그 변화를 추동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 역시 '지배양식/생산양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변화가 순차적인 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지배양식과 생산양식의 변화가 존재양식의 변화를 추동한다는 건 지극히 일반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사실 그 반대의 경우도 꽤 많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 자본주의적 소비패턴을 거부하는 사람들같은 경우다. 사실 지배적인 가치관을 거부하고 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중 상당수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존재양식의 변화가 지배양식이나 생산양식의 변화를 추동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한다면 출발지점을 그것으로 상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난 그런 점에서 강신주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다. 대놓고 자본주의를 부정하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2.
난 '초연한 합리주의자'란다. 좋게 말하면 후자 '합리주의자'에 방점을 찍으면 되고 나쁘게 말하자면 전자 '초연한'에 방점을 찍으면 된다. 말만 많지 실제로 하는 건 별로 없다는 의미다. 그런 사람에게 중요한 건 타인들의 노력이다. 그들의 노력덕에 세상이 좋아지면 그 덕을 좀 보고 싶은 거다.
그래서 고작 관전자에 불과한 포지션을 잡고 있으면서도 타인들의 행동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정치공학적 관점의 발달'로 이어진다. 즉 본인들은 물과 기름같은 사이라고 주장하지만 내 시각에선 비슷해 보이는 현상이 벌어지는 거다. 그리고 그 시각에서 보자면 강신주나 강신주를 비판하는 이들이나 내가 보기엔 큰 차이 없다.
3.
'강신주 현상'은 일종의 유행이다. 난 이 견해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편이다. 한때 힐링이 유행했지만 그것으론 도저히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한 이들이 인문학-철학으로 넘어오면서 벌어지는 유행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현상에서 무엇이 중요한 걸까?
난 강신주 개인이 아니라 '그가 왜 유행의 중심에 서게 되었는가'다. 만약 70~80년대처럼 고속성장을 구가하던 시기나 소비문화가 만개했다고 일컬어지는 90년대 초반이라면 강신주 현상이 벌어졌을까? 그럴 리가 없다. 자신들의 물질적 풍요를 충족시켜주는 자본주의를 까대는 험상궃게 생긴 인문학자가 하는 알아듣기 힘든 소리를 반길 리가 없지 않은가?
강신주 현상이 중요한 건 그 지점이다. 강신주 역시 대중들의 호출에 응답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대중들은 왜 강신주를 원하는 것일까? 진정 중요한 건 이 질문이다. 특히 강신주의 언행이나 혹은 강신주 현상이 어떤 이유로든 마음에 들지 않거나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중요하다. 즉 강신주 현상에 열광하는 이들은 앞서 1번에서 언급한 기준에 따르자면 '지배양식/생산양식의 변화'를 통해 '존재양식의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P.S.
강신주를 원하는 이들이 주로 '중산층'이란 주장이 있다. 그런데 사실 난 그렇게 생각하진 않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징조가 아주 안 좋다라고 본다. 비록 중산층의 몰락이란 상황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그런 견해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중산층의 몰락이 의미하는 건 중산층보다 못한 이들의 삶은 이미 예전에 무너졌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신주처럼 안전하게 소비할 수 있는 유행이 중산층을 중심으로만 소비된다는 건 중산층보다 못한 이들은 이제 아예 희망 자체를 접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위기는 곧 기회라는 측면에서 다가갈 수도 있지만 기회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없다면 위기는 그냥 위기일 뿐이다.
4.
강신주의 TV츨연. 그것도 공중파. 박그네 취임이후 더욱 더 퇴행의 길을 겪고 있는 공중파에서 강신주가 무슨 말을, 어느 정도 수위에서 할 수 있을까? 설령 한다고 한들 그것이 방송될 수 있을까? 파급력은 강하지만 주장의 전달이란 측면에선 확연한 한계를 갖고 있는 매체. 강신주가 그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하는 이유? 미안하지만 난 잘 모르겠다.
그렇다면 단지 그런 이유로 '파급력은 강하지만 주장의 전달이란 측면에서 확연한 한계를 갖고 있는' 매체에 출연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나 본데 내 기준에서 보면 아마 그 사람들은 말과는 달리 속으론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대통령 후보자들의 TV토론이 아직은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세상에서 우린 살고 있다. 비록 한계가 명확할 지언정 무시하는 것보다는 낫다.
물론 그런 일종의 보이콧이 나름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지만 그걸 타인에게까지 강요하는 건 별로다.
5.
강신주 현상이 소비되는 행태에 대한 문제제기. 정확히 말하자면 강신주가 중산층의 고급스런 소비행태의 일환으로 취급되는 것에 대한 지적같은 경우다. 예전엔 나도 그런 면에 대해서 꽤 비판적이었던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의 난 그 부분에 대해서 거의 포기상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이슬람의 마호메트나 기독교의 예수조차도 후세 사람들에 의해 신격화되고 물신화되는 것을 피하지 못 했다. 심지어 아예 그러지 말라는 말을 경전에 남긴 부처조차도 그런 대접을 완전히 피하진 못 했다. 그걸 지금 강신주더러 하라는 말인데 만약 강신주가 그걸 해낸다면 개인적으로 역사책에 기록되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 대중적인 영향력을 갖추고도 그런 경우를 잘 피하고 있는 인물은 현재 유재석 한 명뿐이다. 모르지. 유재석이 죽으면 역시 그런 식으로 소비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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