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 영화 대부에 등장하는 명대사중의 하나다. TV예능 프로그램인 런닝맨에 등장해서 새삼 기억해낸 대사다.
대부라는 영화는 온갖 똥폼이 난무하지만 결과적으로 조폭 영화다. 이전에도 보니와 클라이드를 다룬 영화에 대해 서술하면서 지적한 바가 있지만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이른바 느와르 영화들이 온갖 똥폼을 다 잡지만 결과적으론 돈때문에 사람을 협박하고 죽이는 깡패들을 다룬 것이란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보잘 것 없는 인간군상들을 다룬 영화에 온갖 똥폼이 등장하고 그게 사람들에게 먹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위에서 언급한 류의 명대사들 혹은 그 명대사들이 실제로 구현되는 모습을 담기 때문인데 그건 그 명대사들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이 현실에서도 꽤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 대부에 등장한 저 명대사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두 가지 정도의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다분히 정치공학적인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적인 차원의 일이다.
먼저 정치공학적인 부분. 역사적으로 '적을 섬멸하려는' 시도는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극렬했던 것은 공통적으로 사랑과 자비를 중심 사상으로 한다는 종교간의 갈등이었다는 건 매우 모순적인 일이고 심지어 그게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건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그런 극렬한 시도를 지금도 줄기차게 반복하는 집단인 근본주의 기독교라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남한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막무가내식 이스라엘 지지 역시 그런 차원이다. '섬멸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모순이긴 한데 내가 보기에 종교는 있는 것보다는 없어지는 게 여러 모로 더 이득이다.
아무튼 그런데 그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그런 시도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역사적으로 그런 시도들은 물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비록 마음에 안 들지언정 적의 존재 자체를 섬멸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하나다. 어떤 식으로든 공존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화 대부에 등장하는 명대사처럼 '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 가까이 두라'는 식의 적극적인 공존정책이든 아니면 다른 영화에 등장하는 명대사 '우리 그냥 평화롭게 무시하자'는 것이든 말이다.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와는 상관없이 이 두 명대사가 폼고 있는 내용은 현실에 대한 지극히 정확한 인식에서 비롯된 매우 실용주의적 태도다. 그리고 그런 성향은 사실 진보보다는 보수의 태도에 더 가깝다.
그런데 정작 남한의 자칭 보수들은 전혀 그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인식이나 태도를 갖고 있지 않다. 많은 이들이 내가 그들을 보수가 아니라 극우로 부르는 걸 마뜩찮아 하지만 난 그들에 대한 호칭을 바꿀 마음이 없다.
같은 언행을 보이는 일반인들도 많다. 하지만 난 그걸 극우들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라 보진 않는다. 극우들은 속내야 어떻든(뭐 결국은 대부분 경제적인 이득 때문이지만) 일종의 사상적 확신범(종교를 믿는 태도와 극우가 화학적으로 잘 어울리는 것도 이런 이유다)이지만 일반인들의 그건 단순히 무지에서 비롯된 언행이기 때문이다.
물론 비록 무지에서 비롯된 언행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순간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건 엄청난 비극을 낳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마냥 눈감아 줄만한 일인 건 아니다. - 나찌의 극우주의가 꽃을 피우게(...) 된 것은 무지하고 비현실적인 자칭 우파들의 방관, 그것도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한 방치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불행히도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잘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상황은 지금도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보자면 자칭 우파요 보수인 이들의 종족 특성은 무지와 현실을 무시하는 망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인식상의 문제는 약간의 전제가 필요하다. '적'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어느 정도의 수준을 담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무지한 우파나 보수주의자들이 아니라 자기 생각이나 가치관에 대한 최소한의 논리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있으며 그 인식의 현실적 근거를 알고 있다는 전제. 사실 이 정도의 수준조차 담보하지 못 하는 이들은 친구든 적이든 별로 상대할 가치가 없다. 이건 자칭 진보 역시 마찬가지다.
단 그런 조건을 어느 정도 충족시킨다면 이런 적은 오히려 친구보다도 훨씬 더 상대할 가치가 있다. 뻔한 이들끼리 모여 앉아서 뻔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상호간의 만족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발전의 여지가 더 크기 떄문이다. 온라인 상에서도 익히 잘 알려진 친목질의 폐해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무지한데 자신이 무지한 것조차 모르고 심지어 그런 것을 알아보겠다는 태도조차 없는 우파니 보수주의자들이나 상대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광신에 빠진 극우들은 여기서도 열외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영화 대부에 등장하는 저 대사를 명대사라고 칭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저 대사가 왜 명대사인지 얼마나 고민을 해보았을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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