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등장하는 아주 실험적인 몇몇 영화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들의 경우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뭐래도 결국은 이야기다. 심지어 간혹 등장하는 실험적인 영화들이라고 해도 이야기 구조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대담한 시도를 하는 경우는 거의 보기 힘들 정도다. 이미 아동심리학에서도 가르치기를 아이들은 이야기에 집중하지 그 이야기의 근거, 배경지식같은 것들의 적절성 여부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사에서 '이야기'가 가지는 비중은 막중하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와 다른 의미에서 이야기의 '소재'에 방점을 찍은 경우도 있다. 잘 알려진 말에 따르자면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된다'는 거다. 즉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소재의 발굴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간혹 이 두 가지를 반대되는 개념인 양 언급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그건 잘못된 평가다. 제 아무리 독특하고 신선한 소재라고 해도 이야기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의미전달이 힘들어지고 반대로 별 거 아닌 소재라고 해도 이야기가 충실하면 대중들이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이른바 소재주의와 이야기는 상호 대척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거다.
이 영화 '플랜맨'은 지극히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다. 그리고 그런 장르적 구분으로 봤을 때 최소한의 만듦새는 인정받을만 하다. 많은 이들이 전혀 다른 성격의 배우로 인식하는 편이지만 적어도 내 관점에서 보자면 로맨틱 코미디가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인 정재영이 나왔고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지민의 연기 역시 이미 비슷한 류의 수많은 영화나 TV드라마에서 익히 보아왔던 수준은 담보해준다.
그러니까 배우들이 연기라는 면에서 최소한의 평타 혹은 그 이상을 쳐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자체는 그 수준에 전혀 못 미친다. 그야말로 최소한의 만듦새, 딱 그 수준이다. 이미 영화 '회사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 차례 지적한 바 있는 견습작가 수준의 엉성한 장면과 에피소드들이 어김없이(...) 등장하며 주인공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대사가 아무런 맥락도 없이 툭툭 튀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장면들은 진짜 봐주기 거북하다.
개인적으로 이제껏 본 한국영화중 가장 재미있었던 혹은 인상깊은 영화를 꼽으라면 거의 매번 상위권에 포진하는 영화가 ''바르게 살자'인데 배우 정재영의 가치가 가장 잘 드러난 영화라고 본다. 게다가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봐도 가장 만듦새가 뛰어난 영화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아마도 정확히 그 반대편에 이 영화 '플랜맨'이 있지 않나 싶다.
같은 주연배우를 쓰고 여전한 연기력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주연급이 아닌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낮은 탓일 게다. 주인공에게 공을 들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인문학적, 사회학적 제 1명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상황이 도래하지 않는 한 어차피 세상 혼자서 살 순 없다.
인간이 하는 일인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있으면 그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어떤 식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어떻게 그런 식의 특징적인 관계가 성립하게 되었는가란 설명들이 있을 게다. 이 관계에 세심하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관계의 특징에 따라 등장인물의 성향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특징적이 된 등장인물들의 성향은 영화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즉 특정한 특징을 가진 인간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특징적인 반응을 보일 것인가란 부분이 명확해지면 이야기의 개연성과 다양함이 살아나는 것이 보통이며 그 결과는 이야기의 탄탄함(개연성)과 다양함(풍성한 에피소드)이다. 그런데 이 영화 '플랜맨'은 그런 부분들이 아주 약하다.
문제는 그런 부분들이 그렇게 힘든 작업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이야기 속 주인공의 캐릭터를 설정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단순히 하나의 성형을 가진 일차원적 존재로 묘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특정한 인간의 특징적인 성향에 따라 똑같은 상황에서도 드러나는 행태는 사뭇 달라질 수 있고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인물의 경우 하나의 특징을 강조하기 보다는 그런 특징을 가진 인물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변화하는가가 핵심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특정한 인간에게 특징적인 사건을 쥐어주고 그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에 집중하는 영화들도 꽤 많은 편이다.
어쨌거나 주요 등장 인물들에 비해 조연급인 배우들의 경우는 구태여 그렇게 다채로운 성향들을 묘사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얘는 옛날부터 그랬다'라고만 해도 충분하다. 비록 그런 언행의 근거가 불충분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런 부분을 놓치고 있다. 덕택에 조연급 배우들의 연기는 이야기의 맥락과 상관없이 뜬 금없는 경우가 많다. 결국 캐릭터 설정에 실패한 셈이다.
이게 문제가 되는 건 이미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변화하는 인물을 묘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외부의 자극과 무관하게 스스로의 자가발전만으로 변화하는 존재라는 얼토당토않은 상황이 연출된다. 누차 말하지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한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 하는 신 혹은 절대자란 존재를 막무가내로 믿는 광신도들은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우길 거다. 물론 여기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는 반신반인이 존재한다고 우기는 이들도 포함된다.
모든 면에서 평타는 쳤지만 사실 그 이상도 없다. 역시 문제는 디테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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