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사실은 다 똑같아.'
사실 이런 말은 대체로 효용성이 거의 없다. 그런데 정작 세상살이를 말할때 이것만큼 진실에 가까운 언명도 없다는 건 아이러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말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이들'에게 주로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비관의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에 비해 결과물이 너무나도 초라할 때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다. 몇몇 예외적인 사례들도 있겠지만 그건 일단 논외로 하고.
그렇다고 자기가 하고 있는 어떤 것과는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사실 오산이다. 단지 지금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너무 초라해 보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일 뿐이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기회비용'의 문제, 선택의 문제인 셈인데 '만약 내가 지금 이걸 선택하지 않고 다른 걸 선택했더라면 지금 이것보다는 나아지지 않았을까?' 라는 거.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런 생각은 별 의미는 없다. '역사엔 가정법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역사의 범주엔 자신들이 동질적인 존재라고 믿는(노파심에 적시하자면 '믿는 것'과 '객관적 사실'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집단의 역사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살아온 날들도 포함된다. 즉 '개인의 역사에도 가정법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두번째로 앞서 언급한 '기회비용', '선택'의 문제다. 많은 이들이 이것이 학문적인 개념이고 객관적으로 계량화가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정작 이 개념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단점은 잘 모른다. 그건 바로 개념들의 객관화, 계량화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에 주로 의거한다는 점이다. 즉 예상치나 기대치가 아니라 지나온 과정을 통해 나온 결과물을 사후적으로 통계화하거나 분석한 결과라는 거다. 만약 이걸 '예상치'나 '기대치'로 환산한다면 계량화의 오차 범위는 엄청나게 늘어난다. - 경제학적으로 그렇게도 잘났다는 인간들이 모여서 매년 작성하는 이른바 경제 성장률이 매년 큰 오차를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다.
결국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기대'나 '예상'은 결국 확률의 문제가 되는 셈이다. 한 인간의 선택이 다른 선택들에 비해 어떨 것인가라는 것 역시 기대나 예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한 그 역시도 확률의 문제가 되는 것이고 확률의 문제는 늘상 그렇듯 개인의 노력에 의해 결과물이 달라지는 법이다.
다만 주의할 것이라면 개인의 노력이 확률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노력이 확률을 높인다는 사실은 절대 부인할 수 없지만 그 높아진 확률이 모두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부당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건 지극히 일상적인 일일 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 이루 형언하기도 힘들만큼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그 다양함만큼이나 변수도 늘어나는데 그 모든 변수를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하고 그 변수들이 나, 혹은 나의 노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그런 지극히 일상적인 다양한 변수들이 어느 순간 구조화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부당함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이를 테면 태어나보니 집안이 갑부인 경우, 그런데다 내가 속한 집단이 그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무관심하고 무능해서 출생의 차이라는 선천적인 차이가 노력이라는 후천적인 요인을 압도한다면 그건 '부당한 것'이다.(주1)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보자면 결국 '다 똑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왜 실망하고 비관하는 지 모르겠는 바는 아니다. 그리고 그 실망과 비관이 통제범위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냥 술 한잔 하고 잠 푹 잘 자고나면 해결될 문제다. 그런데 그 정도를 넘어서면 이는 단순한 실망이나 비관이 아니라 반사회적 성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최근 유행하는 '힐링'류의 미적지근한 위안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 그게 일회적이라는 측면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류의 위안은 나의 비관이나 실망이 어떤 것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어떤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 모든 실망과 비관의 원인은 나라는 개인의 문제로 치환된다. 나와 내가 속한 집단과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국제시장의 주인공이 그 모든 집단적 사건들로부터 발생한 문제들을 자신의 것인양 치환시켜버리는 퇴행을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런 반항도 문제의식도 갖지 못 한채 살아가는 순종적 인물이나 모든 책임을 타인과 집단에게 전가시키는 반사회적 인물은 그런 면에서 결국 똑같은 문제로부터 발생한 양 극단의 부정적 사례에 불과한 셈이다. 다만 군사독재 시절부터 부과된 국가, 국민, 민족이란 집단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남한은 여전히 자존감이라곤 없는 노예상태의 퇴행적 인물을 일종의 바람직한 인간형으로 제시해왔고 여전히 그것이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주1)
여담이지만 남한 사회가 그런 모순과 부당함에 대해서 무감각한 것은 자유주의와 봉건주의의 잘못된 만남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부의 세습, 신분의 세습을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건 지극히 봉건적인 사고 방식인데 사실 자유주의는 개인을 중시하지 가족이나 집안같은 집단적 가치에 집중하는 사상이 아니다. 그런데 남한에선 돈을 버는 것 같은 경제행위는 자유주의로 바라보면서 정작 그 축적된 부의 성격에 대해선 신분제를 바탕으로 하는 봉건적 집단주의로 바라보는 언어도단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상이나 논리의 일관성같은 건 하나도 중요치 않다. 그저 어떤 것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가가 중요할 뿐이라는 반이성주의의 발현인 거다.
'Kinoki'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시장에 대한 단상들. (0) | 2015.01.10 |
---|---|
빈대 잡으려고 집 태우는 방법. (0) | 2015.01.04 |
위험한 기계론적 평등주의자들. (0) | 2014.12.29 |
퇴행일까? (0) | 2014.11.29 |
[배틀 로얄] 경쟁. (0) | 2014.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