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 영화 평론가가 그런 말을 했다. 영화 변호인과 국제시장은 결국 같은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이 영화들은 매우 중요한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지만 한 편으론 가장 중요한 현실을 극적으로 외면하고 있다고 말이다.
최근 화제인 영화 국제시장은 누구나 알다시피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심지어 해당 영화의 주인공이 당대의 다른 평범한 인물들과는 달리 아주 정치적으로 첨예한 사건들에 모두 관여하는데도 말이다. 집단적 의식이나 정치적 의식은 거세되고 오로지 한 인물의 고군부투기만 남았다. 영화 변호인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의 분투기는 남았지만 그 개인을 둘러싼 정치적 운동과 집단은 삭제되었다.
결국 사실 가장 중요한 배경이라할 정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채 모든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린다는 점에서 영화 변호인이나 국제시장이나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고 그 영화평론가의 지적은 지극히 적절하다. 그런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터부시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남한 정치의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 두 영화가 정치를 삭제하는 방식은 다르다고 본다. 변호인같은 경우는 누가 봐도 생산자의 내부 검열이 작동한 것이다. 개인의 분투기를 담으면 공감하는 사람들이 특정한 정치집단이 거론되는 순간 반감을 보일 것이라는 남한 정치의 후진적 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런 부분을 삭제한 것이다. 반면 국제시장은 생산자인 윤제균 감독의 얼척없는 주장처럼 정치적인 연관성을 거세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망상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이다.
내가 변호인보다 국제시장이 더 퇴행적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단순히 나의 정치적 지향성때문이 아니라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다. 자기검열이나 망상이나 부정적인 건 마찬가지지만 어느 쪽이 더 비현실적이고 몰상식하며 반이성적인가를 따지면 분명히 국제시장쪽이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거 마치 북한과 해묵은 반목을 거듭하면서 다른 입으론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하는 분열증적인 현상과 다를 바 없다. 웃기는 건 그런 비현실적인 망상에 가득찬 개구라에도 환호하는 이들도 있다는 거다. 누차 지적하지만 남한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과잉된 인간들은 이처럼 내용없고 현실성없는 망상에서 비롯된 구라에도 단지 자신의 정치적 지향과 맞는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인 추앙을 보내는 자칭 보수라는 것들이다.
현재 영화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쟁을 비논리적인 정치공세와 색깔론으로 몰고가는 허접스러운 짓거리를 하는 이들도 그들이다. 솔직히 그것들만 입닥치면 영화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쟁은 역사와 정치를 들여다 보는 중요한 고리를 제공할 수 있는 아주 생산적인 논쟁이 될 것이다. 그런 좋은 기회를 무능하고 무식한 것들이 망치고 있는 거다. 남한 사회를 망치는 족속들인 거다.
2.
어떤 영화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해 '아버지의 부재'라는 이야기를 한다. 즉 국제시장엔 국가와 개인이 나타나지만 그 연결 고리는 아주 미약한데 영화 초반 잠깐 등장한 아버지의 모습이 영화 말미에 반복되는 것은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나타내는 영화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솔직히 아주 미심쩍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이 영화를 관통하는 일반적인 정서는 '성인남성 위주의 봉건적 가부장제'다. 문제는 이런 류의 집단적 인식은 기본적으로 국가 혹은 민족같은 물적 토대를 공유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런 물적 토대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 사이에선 이런 류의 유사한 가치관이 나타나기 힘들고 혹여 나타나더라도 그 양태는 사뭇 달라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버지와 국가가 분리될 수 있단 말인가?
일단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인식은 사실 망상이라고 보는 편이지만 굳이 까발려 보면 이런 거다. 즉 현실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의 모습과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다르다는 믿음이다. 영화 초입부와 말미에 제시되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모습이 그런 것을 반영하고 있는 듯 한데 미안하지만 그런 류의 불확정적인 이미지를 통해 그것을 증명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다른 어떤 이상적인 형태의 무언가가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을 순 있을 거다. 물론 그것마저도 비현실적이고 불확정적이란 점에서 보자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류의 단절이 가능하다는 시각자체가 문제다. 인류 역사상 이런 식의 인식단절이 일어난 경우는 흔치 않다. 대체로 역사에 길이길이 기록될만큼 큰 사건이어야 한다. 가장 비근한 예가 바로 중국의 문화혁명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걸 매우 부정적으로 보지만 실제로 현재 중국의 대도시에서 받아 들여지는 많은 근대적 가치관들이 실은 이 때 탄생한 것이다. 반면 당시 문화혁명의 여파를 거의 받지 않은 중국 외곽 지역은 여전히 봉건적 질서가 판을 치고 있다.
이런 예를 놓고 보면 오히려 우리 근대사는 그토록 크나큰 사건들이 연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발전보다는 퇴행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재미있는 건 이런 인식적 퇴행은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체로 어린 아이가 성인이 되는 것은 부모로부터 독립하면서 부터다. 반면 한 인간이 독립적인 존재로 서지 못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역시 부모로부터 독립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고로 이젠 아무 의미도 없거나 심지어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의 어떤 질서나 가치관에 집착하는 퇴행은 부모의 부재때문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함으로부터 발생하는 거다.
그런데 가부장적 봉건주의, 국가주의, 민족주의가 득세하다 못해 절대적으로 옳은 가치처럼 받아 들여지는 남한에선 우습게도 이걸 거꾸로 알고 있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다. 즉 이런 집단적 가치관의 부재가 문제를 만든다고 보는 건데 단언컨데 이런 류의 단정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근거도 논리도 없는 단지 맹목에 불과하다.
이 영화를 '아버지의 부재'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부재는 아버지의 역할에 대해 알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런데 정작 영화속 주인공은 거의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봉건적 가치관에 철두철미하게 복무하는 행태를 보인다. 이건 부재나 단절이란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기 보다는 완전히 그 반대의 현상인 거다.
고로 만약 이 영화를 아버지라는 시각에서 파악하려면 부재나 단절이 아니라 '국가라 불리는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이 영화엔 국가와 개인이 등장하고 아버지가 부재하는 게 아니라 <개인과 '아버지라 불리는 국가의 존재>라는 도식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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