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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쉴레

The Skeptic 2011. 6. 11. 12:07

에곤 쉴레

 

야심한 밤에 TV를 보면 그래도 꽨 괜찮은 프로그램들을 보게 된다. 오늘은 TV미술관인가를 봤다. 고백컨데 처음 봤다. 일전에 어처구니 조영남이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보다 하도 한심해서 바로 TV를 꺼버린 후로 미술관련 프로그램은 올만에 보는 것이었다. 작가 은희경이 에곤 쉴레의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에곤 쉴레의 그림을 꽤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다. 

 

미술 작품이 재미있는 건 그림 그 자체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기준의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만약 기술만 놓고 보자면 초창기 초상화나 정물화, 아니면 하이퍼 리얼리즘의 작품들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그림과 관련된 그런 기준은 사진의 등장과 함께 허물어 졌다. 물론 최근에도 다른 종류의 하이퍼 리얼리즘은 살아있다. 작가 이외수의 작품에 삽입된 그림이 그런 종류다. 극사실주의로 묘사되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색감과 질감은 실물과 차이가 있고 그 미묘한 차이가 전혀 다른 감상과 관점을 보는 이들에게 제시해준다. 

 

아무튼 그림이 재미있는 것은 바로 개개인의 관점의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같은 그림을 보고도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바로 그 주관성이 재미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사 모든 것이 다 그렇듯이 주관성도 경계가 존재한다. 그 경계를 넘어가 버리면 설득력을 갖을 수가 없다. 이를테면 최근 딴나라당 대표가 된 황우여가 '대통령의 공약인 반값 등록금을 실현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라고 했다가 어제 갑자기 '죄박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라고 매우 주관적인 해석을 늘어놓으며 횡설수설하는 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주관성에 무슨 놈의 설득력이 필요하느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필요없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도 된다. 누가 나서서 말릴 일도 아니다. 아니 그런 인생을 살면 주변에 당신을 말려줄 사람도 없을 테니 아무 문제될 것 없다. 다만 말을 안 들어준다고 혹은 남들은 다 그럴만하다고 인정하는데 혼자 인정 못하겠다고 혹은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남대문에 불지르는 개꼴통 늙은이같은 짓만 안 한다면 말이다. 뭐 해도 괜찮다. 조용히 은팔찌 차고 감방가면 되니까. 지나가며 하는 이야기지만 조영남이가 어처구니가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설 익은 예술쟁이들이 같잖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에곤 쉴레의 그림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감상이 일치하는 편이지만 딱 두가지가 나와 갈렸다. 그 중 하나는 은희경은 '불편한 매혹'이라 표현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집 거실에 걸어두고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그림은 아니라는 것인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을 거실에 걸어놓는 것 자체가 번거로운 짓이라 생각하는 사람이라 특별히 그의 그림을 걸어놓고 자랑할 마음은 없지만 저작권에 침해되지 않는다면 그의 그림이 프린트된 티셔츠정도는 별 거리낌없이 입고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그게 그의 대표작인 누드화라고 해도 말이다. 

 

두번째 지점은 그의 그림에 대해 '개인적으로 불행한 과거사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보인다'라고 표현한 대목이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난 그의 그림에서 그런 점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은희경의 설명을 빌면 그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모짜르트도 걸렸다는 그 병, 한때는 병이 아니라 사랑의 증표라고 알려졌던 바로 그 병. 그 때문에 에곤 쉴레는 누드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누드화들은 매혹적이지만 불편하고 불안한 형태를 띄게 된 것이라 한다. 

 

이중적인 감정이란 것 자체가 의지라는 단어와는 사실 거리가 멀다. 차라리 당대에 칭송받는 예술 형태를 벗어난 선택을 함으로서 문화적 충격같은 불편함을 안긴다면 의지와 상관이 있을 테지만 말이다. 만약 에곤 쉴레의 누드화에 의지가 있다면 그것은 매우 방어적인 의미일 것인데 일반적으로 그런 정도를 의지라고 여기진 않는다. 그냥 사소하고 소심한 반항과 복수 정도? 자기 암시가 강하거나 강력한 자기암시가 필요한 상태는 아직도 맹아적인 단계, 즉 의지와 객기 사이의 어디 쯤인 것이다. 그것이 의지가 될지 객기로 사그라 들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그림에서 맹아적인 단계로서의 의지같은 걸 보았다는 건 아니다. 그냥 난 그가 육체에 대해 매혹을 느꼈다는 정도로 밖엔 안 느껴졌다. 아마도 그 때문에 첫번째 차이 '불편한 매혹'이란 지점에서도 감상이 갈린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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