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rl Klugh
1.
눈앞의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왜곡시키는 것이 인간이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없던 기억을 만들어 내기까지 한다. 이 상태에서 '카더라 통신'이 덧붙여지면 '무상급식해주면 거지된다'는 근거불명의 불신지옥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아무튼 기억은 그렇게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의적인 기억들의 대부분은 비록 왜곡된 형태라고 해도 불신지옥과 만나지 않는 이상 타인의 삶에 큰 해악을 끼치진 않는다.
Earl Klugh 라는 기타리스트가 있다. 자주 찾는 양반은 아닌데 이상하게 이름은 잘도 기억하고 있다. 우스운 건 내가 이 양반을 찾을 때는 펑키한 음악이 땡길 때라는 것이다. 그런데 얼 클루, 이 양반은 전혀 그런 쪽이 아니다. 조지 벤슨과 콜라보레이션을 할 정도면 째지하면서도 달달한 기타를 타시는 양반인 것이다. 그런데 난 전혀 다른 용무로 그 양반 작업실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당연히 번짓수가 맞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런 장님 문고리잡는 짓을 벌써 몇십년째 틀리지도 않고 똑같이 해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또 역시 같은 짓거리를 하고야 말았다. 얼 클루, 이 양반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서운함을 넘어 죽자고 달려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몇 십년동안 만날 때마다 '그런데 뭐하시는 분이죠?'라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질문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니까.
그리하야 오늘도 난 번짓수를 잘못 찾았지만 그래도 그냥 그 양반의 달달한 기타 연주를 듣고 있다.
2.
이해가 전혀 안 갈 이야기중의 하나지만 예전에 처음으로 잉위 맘스틴의 기타 연주를 들었을 때(그러니까 난 이 양반의 명성에 비해 실제 연주를 들은 것은 꽤나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엉뚱하게도 '얼 클루가 기타 한 음을 잡을때 잉위 맘스틴은 같은 음을 여러 번 잡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었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억은 참 오래도 남아 있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왜곡에 가까운 일일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한 기억은 오래가는 법이다. 심지어 잊어버리고 있다가도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가장 손쉽게 떠오르기도 한다. 말하자면 기억과 인간의 주관성은 떼기 힘든 밀접한 관계가 있는 셈이다.
기억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형성되는 측면도 있는 반면 주관적 가치관은 스스로의 비판적 의식에 의해 충분히 형성-소멸-교정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기억보다는 가치관 쪽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것이 효과적인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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