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ki

'사랑을 놓치다'

The Skeptic 2012. 3. 12. 04:01

'사랑을 놓치다'

 

이 영화 '사랑을 놓치다'는 과연 사랑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중 어디쯤에 놓여있는 것일까? 언뜻 보기엔 평범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렇다. '로미오와 줄리엣' 류의 불꽃튀는 짧은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래된 노부부의 인생살이 같은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 잘 들여다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이 영화속 사랑이야기의 특징은 찌질하다는 것이고 구태의연하며 매우 비현실적이라는 거다. '찌질/구태의연/비현실'이 세 단어의 조합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이 영화속 사랑 이야기는 평범한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이란게 그렇다. 제 아무리 심심한 사랑이라고 해도 어느 한 순간은 불꽃같은 게 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 영화엔 그런 순간이 없다. 아니 없다기 보다는 그런 순간조차 심심하게 지나간다. 마치 그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투다. 오히려 강조하는 것은 송윤아의 지고지순함이다. 이게 영화 내내 강조되는데 적어도 내게 그 위력은 엄청났다. 얼마나 강력한 요소였는가 하면 이 영화속 사랑 이야기란 거 전혀 새롭지 않다. 눈길을 잡아끌만큼 새로운 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모든 게 구태의연, 그 자체다. 송창식 할아버지의 노랫가서처럼 '언젠가 어디선가 한 번은 본 것 같은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봤다. 왜?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길을 조금 우회해야 한다. 

 

이 영화가 강조하는 바 송윤아의 지고지숭함, 그런데 이 지고지순함이란 걸 가만히 까발려 보면 우린 아주 이상한 걸 보게 된다. 일단 설경구란 캐릭터를 보자. 눈치라곤 발톱의 때만큼도 없다. 이 '눈치없다'는 게 남한에선 다분히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남자의 '눈치없음'은 강단있음과 대범함으로 여자의 그것은 아둔함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눈치가 없다는 건 남의 심기를 헤아려 배려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게다가 입도 걸고 행동 역시 폭력적이다. 언뜻 보면 이른바 '쎈 남자'의 전형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룻밤을 보낸 여자에게 담배사러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쳐 버리는 위인인 것이다. 말만 그럴듯하지 실상 볼 것 없는 종자란 의미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우리의 송윤아는 이런 위인을 사랑한다. 뭐 그럴 수 있다. 사랑이란 게 다 그런 거니까. 그런데 그런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될 수 있다는 시각은 이상하지 않은가? 무언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 그 이유는 이게 신파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구태의연한 신파다. 그렇다고 신파를 나쁘다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요즘은 드물겠지만 그런 사랑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시도 사랑의 한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알다시피 우리의 신파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제와 매우 깊은 연관을 갖는다. 즉 신파라는 게 사랑의 한 형태가 아니라 누구나 따르고 본받아야만 하는 사랑의 올바른 표본인 양 떠받들여질 우려가 있다는 의미다. 신파, 그것도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를 표방하는 신파가 그렇게까지 대접받을 이유는 별로 없다.

 

사실 잘 따져보면 이렇게 해석하지 않아도 될 것을 굳이 이렇게 해석하게 되는 이유는 나 역시 그런 것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 속 설경구같은 인간인 건 아니다. 난 사실 그와 정반대되는 인간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있다. 바로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데 그리 능숙하지 못 하고 나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도 익숙치 못한 사람이란 점이다. 물론 그런 점은 남성들의 특징이긴 하다. 인간의 과학은 이런 종류의 남녀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증명해냈다. 물론 인간은 선천성보다는 후천적인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존재다. 문제는 나 역시도 워낙 그런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나고자란 탓에 후천적인 교육이나 경험을 쌓을 기회도 제대로 없었다는 거다. 당연히 그런 쪽의 능력이 박약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나의 행동이 설명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매우 위험할 수도 있는 신파를 다룬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화를 끝까지 몰입하여 보았다는 점. 입으론 아니라고 말하지만 내 몸과 마음은 그런 류의 사랑에 더 익숙한 존재일 확률이 월등히 높다. 이렇게까지 말해놓고 난 이후에 따라붙기엔 조금 민망한 변명처럼 들리지만 이 영화, 화면이나 음악이 참 잘 만들어졌다. 영화제에서 미술상이나 음악상 정도는 무난하게 받을만한 수준이 아닐까 싶다. 이것들이 내가 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다. 

 

 

p.s.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데 물질적인 변화 이외에 '과연 사람들은 무엇이 변한 것' 인지 잘 모르겠는, 그래서 한 편으론 어쩌면 인간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의심을 품고 사는 내가 보기엔 영화속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사실 나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대부분의 남자들에게 반복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주변에 있는 남정네들중 일단 인간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넘인데 마음에 든다면 빙빙 돌려가며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다. 남자들 그런 거 잘 못 알아챈다. 그렇게 놓치는 거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도 서른이 훌쩍 넘어서야 겨우 알아차린 사실이다. 그걸 몰랐던 20대와 서른 초반에 많은사랑을 놓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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