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ki

나는 공무원이다. 밥 딜란. 불후의 명곡. MashUp.

The Skeptic 2013. 2. 17. 03:54

영화 '나는 공무원이다'에서 주요 소재로 다루어지는 가수는 밥 딜란이다. 매우 중요한 장면에 밥 딜란 짝퉁인 오광록이 등장할 뿐 아니라 주인공의 입을 빌어 그에 대한 헌사들이 가감없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엘비스가 록에 몸을 주었다면 밥 딜란은 생각을 주었다', '너무나 위대한 가사 때문에 노벨 문학상 수상 유력', '롤링스톤지가 뽑은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랭킹 2위'라는 식이다. 사실 이 정도면 이야기를 만든 이가 밥 딜란의 열혈 빠돌이쯤 된다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그런데 정작 난 밥 딜란이 그저 그렇다. 특히 그의 가사가 위대하다는 대목은 공감 자체가 불가능하다. 내가 밥 딜란의 노래를 들었던 시기라면 적어도 약 20년전쯤일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땐 정말로 공부따위와는 사소한 친분관계조차 없었다. 하물며 영국말로 된 가사따위를 이해한다는 건 로또 당첨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중의 하나다. 게다가 난 언어의 지역성을 매우 강하게 인정하는 사람지라 영국말에 대한 기능적 이해가 아닌 문화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뒤따르지 않는 한 그 뉘앙스까지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기도 하다. 물론 밥 딜란의 가사가 그런 지역성이란 만만찮은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만큼의 인터내셔널한(글로벌 스탠다드라는 말보다 이게 훨씬 낫구만)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면 나도 흔쾌히 인정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노벨 문학상을 준다고 해도 인정할 수 있다. 내가 아는 한 아직까지 그런 한계를 뛰어넘은 천재적인 저작을 남긴 사람은 없으니까 자격은 충분하다. 


그래도 그는 노래를 참 못 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취향의 문제지만. 약간 첨언하자면 우리는 이런 취향의 문제에 대해서 흔히 '잘 한다/못 한다'라는 부적절한 기준을 대입한다. 물론 대부분의 상식적인 사람은 이렇게 빗나간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의미를 오독하진 않는다. 문제는 스스로 보수임을 자처하면서 정작 세상엔 아군 아니면 적군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몰상식한 인간들은 늘 그 구정물통에서 행복하다는 점일 거다. 물론 그런 인간들을 보수라고 불러줘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엄청난 오독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다. 밥 딜란의 노래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빕 딜란에 대해 남긴 헌사들중 한 가지에 대해선 나 역시 공감하는 바다. '장르해체' 사실 나이가 들고난 이후엔 음악의 장르를 구분한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의미를 두지 못 했다. 오히려 지금은 '구분' 혹은 '정의'란 것은 사물에 대한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이들에게나 필요한 것은 아닐까라는 다소 건방진 생각도 하는 편이다. 물론 아예 필요없다는 것은 아니다. 언어란 것이 나 혼자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과의 의사소통에 필요한 도구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구분'이나 '정의'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적대적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것을 인정하더라도 사실 사소한 문제는 남는다. 지금 이글처럼 영화, 음악, TV프로그램처럼 여러 장르와 관련된 소재를 다룰 때는 어떤 카테고리에 포함시켜야 할까? 이런 글을 위해 카테고리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키자니 카테고리에 들어간 자료들이 너무 산만하고 늘리자니 한도 끝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은 카테고리를 늘리는 것이다. 이는 비단 개인적인 사례만이 아니라 인류가 이룩한 각종 발전에도 공히 적용되는 바다. 그리고 그런 지나친 분화가 불러온 것은 카테고리간의 전문성을 빙자한 폐쇄성이었고 이는 도리어 인류의 발전에 해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장르해체'라는 시도가 가치를 갖는 지점이다. 물론 난 그런 시도가 인류의 오래된 관습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진 않는다. 다만 전문성을 빙자한 폐쇄성에서 비롯된 절대성, 그러니까 인간이라면 결코 인지할 수 없는 '절대'라는 이름을 참칭한 맹신과 광신의 덫에 빠진 사람들에게 의심과 의문을 품게 만든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최근 들어 그런 것들이 많이 시도되고 있으며 또한 대중적인 인식들도 상당히 나아졌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중 하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란 TV프로그램이다. 우리 가요사에서 위대한 아티스트들의 노래를 지금 활약하는 가수들이 다시 부른다는 기획을 가진 프로그램이다. 간혹 원곡을 충실하게 부르는 시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엔 새롭게 편곡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시도들중엔 아예 원곡과는 전혀 다른 노래, 즉 편곡이 아니라 아예 재해석 수준인 노래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같은 풍경을 보고도 풍경화를 그리는 이도 있고 추상화를 그리는 이도 있으니 뭐라할 일도 아니다. 


그 와중에 오늘 방영된 꼭지에선 상당히 흥미로운 장면이 있었다. 김민종 편이었고 그의 노래중 '착한 사랑'을 부른 나르샤의 무대에서였다. 노래 중반부에 갑자기 백지영이 부른 '그 여자'란 노래의 일부분이 삽입되었다. 신기할 정도로 위화감이 없어서 놀라웠다. 노래가 끝난 후에야 함께 출연한 가수 알렉스가 그런 기법을 'Mashup'이라고 부른다고 언급해 주어서 알 수 있었다. 난 이런 메시업이나 샘플링같은 기법들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어차피 이런저런 새로운 기법들은 해보라고 만든 거니까. 법이나 윤리,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문제삼을 것도 없다. 


문제는 이런 기법이 추구하는 방향이다. 대중적이지 않은 새로운 시도라는 부분은 인정할 수 있다. 그리고 전문성을 빙자한 폐쇄성에 목을 매는 맹목적 광신도들의 몰상식을 부드럽게 무너뜨릴 수도 있을 시도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노파심에서 한 마디 더 언급하자면 부드러운 시도라고 해서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란 착각은 버리는 게 좋다. 강력해서 위화감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부드러워서 받아 들이기 쉬운 쪽이 방법적으로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이런 기법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그리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물론 고작 TV프로그램에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단지 내 욕심에 대한 이야기인 거다. 새로운 시도가 가지는 미덕은 누가 뭐래도 분명 '낯설음'이다. 낯설게 함으로서 그 작품을 접하는 이들애게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예술적인 행위들이 가지는 중요한 목적이다. 그런데 사실 샘플링이나 메시업같은 기법들은 그저 익숙한 어떤 것을 잠깐 비툴어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것 같지만 정작 그렇게 새롭다는 느낌을 받기는 힘들다. 


어차피 TV프로그램이고 대중가요다. 내가 이런 시비를 거는 것이 더 웃기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대중적이고 받아 들이기 쉽다'는 것이 가지는 함정 때문이다. 대중성과 수월성은 분명 좋은 장점들이지만 분명한 단점도 있으니 그건 바로 '단순함'과 '무비판성'이다. 이야기가 단순하면 받아 들이기 쉽지만 그런 단순한 결론을 위해 과정들이 생략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많은 '단순한 이야기'들이 '주의/주장'이 아니라 단순한 '선언/선동'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선언/선동'이 되어버리면 우린 그에 대한 비판의 여지마저도 잃고 만다. 그 단계에 이르면 우린 더 이상 생각하는 동물이 아니다. 



p.s.

영화에서 시작한 글이 팝 음악의 거장을 거쳐 주말 TV프로그램속으로 들어갔다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이걸 진짜 어떤 카테고리에 넣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