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의 수위가 차이가 나는 건 대부분 대상과 나의 관계 탓이다. 나와 별 관계가 없는 대상에 대한 비판은 날카로움을 넘어 인신공격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반면 나와 관계가 밀접하다거나 혹은 나 자신인 경우 비판의 칼날은 쉽게 무뎌지기 마련이다.
최근 신작 애니메이션을 발표한 미야자끼 하야오. 그의 작품보다도 더 주목을 받는 건 그의 정치적 견해다. 최근 들어 경제위기를 안보와 이념의 문제로 덮으려는 시도를 하는 새누리당의 극우적 행보... 아니 자민당 아베정권의 극우적 행보가 극에 달한 가운데 나온 애니메이션계 거장의 정치적 발언이란 점에서 그리고 일본 정치권의 극우적 행보에 반기를 드는 발언이라 더욱 관심을 끈다.
우리 나라 언론들도 그걸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편이다. 그런데 정작 더 중요한 이야기는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주로 그의 이번 신작 애니메이션과 관련된 이야기이자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이번 애니메이션의 소재가 바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로 이용된 비행기를 제작한 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덧붙인 미야자끼 하야오의 설명을 요약하면 이렇다. '시대가 불행하고 비국이라고 해서 개인의 삶까지 그 죄과를 치뤄야 하는가?' 이게 나름 극우적인 행보를 보이는 일본의 정치권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일본의 현 주소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겐 일본 정치권의 극우적 행보가 늘 관심사지만 사실 그보다 더큰 문제는 바로 일본의 정치적 무관심이 극에 달했다는 점이다. 미야자끼 하야오의 발언은 바로 그 경계선상에 놓여있는 셈이다.
지나친 단순화를 무릎쓰고 비교하자면 이렇다.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수많은 유태인들과 집시들, 좌파들이 학살당했다. 그리고 그 일을 담당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란 사람이 있다. 비록 전범 재판소에서 이루어진 발언들이라 실제로 그가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죄를 덜기 위한 거짓말이었는지 확실히 확인할 바는 없지만 그와 그의 재판에 대한 기록들에 의거하자면 그는 자신이 무죄라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무죄임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후에 '악의 평범성'이란 의미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진 사건이다. 물론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례만큼 극적이진 않지만 우리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인식과 미야자끼 하야오의 인식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악의 평범성'이란 매우 단순한 이야기다. 다수 대중이 무비판적으로 갖고 있는 인식과 행동은 그것이 실제론 매우 악한 일이라고 해도 아무도 그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인식에 대해 가장 강력한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그 당시엔 누구나 그렇게 알았고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죄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여기서 가장 흔한 함정중 하나는 그렇게 주장하는 대부분의 사건들이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분신으로 고발했던 시절에도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노동법이란 것이 이미 존재했으며 다까끼 마사오(일명 박정희)나 전두환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던 시점에도 우리 나라는 최고 상위법인 헌법으로 민주주의 국가임을 천명하고 있었다. 심지어 누구나 민주주의 국가임을 안다는 요즘도 좌파와 관련된 허무맹랑한 인식이 판을 치고 있다. 즉 '어쩔 수 없었다'라는 것으로 면죄부를 삼고자 하는 사건들의 대부분이 실제론 '어쩔 수 없었던'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들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번 미야자끼 하야오의 애니메이션과 그에 대한 미야자끼 하야오의 발언은 그 '어쩔 수 없음'이란 경우에 가장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전쟁, 즉 타인들을 집단적으로 살해하는 행위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악행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인데 어째서 이것이 '어쩔 수 없음'의 대상이 되는 것일까? 우습지만 그 이유는 악행의 규모와 범위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규모가 너무 크면 그 악행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그것을 실감하기 어렵고 설령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그에 반대하기도 쉽지 않다. 악행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다는 의미고 그것에 반대한다는 것을 그들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인데 견제없이 극단적으로 편향된 집단은 거의 필연적으로 소수에 대한 극악한 위해를 가하는 것이 보통이니까 반대조파 어려울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미야자끼 하야오의 견해는 옳은 것일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그 당시 사람들을 모두 비난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시절의 비극과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알고 다음엔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평가하면서 ' 그 때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라고 합리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게다가 역사는 이미 벌어진 일이다. 우리가 뒤늦게 그것을 합리화한다고 해서 그것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희생된 많은 이들이나 군사쿠데타와 그로 인해 파생된 5.19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을 충분히 위로하고 보상한다고 그 역사적 사실이 없어지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비판은 날카로워야 한다. 특히 그 비판이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건이나 사람인 경우 나아가 바로 자신인 경우 더더욱 말이다. 비록 자존심같은 측면에서 볼때 거부감이 심해서 남에겐 발설할 수준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다음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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