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ki

[엘리시움] 두번째 이야기.

The Skeptic 2014. 1. 25. 03:57

영화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없는, 그러나 사변적으로 내 관심을 끄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스포일러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스릴러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이 정도의 스포일러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닐 거라고 보고 글을 쓴다. 뭐 그런 류의 영화라고 해서 안 쓴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니 혹여 '장르를 불문하고 스포일러가 있으면 영화를 보는 재미가 떨어진다'는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안 읽은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1.

영화 '엘리시움'에서 주인공이 필사적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엘리시움으로 가려고 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일하던 공장에서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되어 단 5일이란 시한부 선고를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밑에서 언급하겠지만 엘리시움의 의료 기술은 그야말로 끔의 경지고 주인공은 엘리시움에 가서 치료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내 관심을 끈 두 가지 사건중 하나가 바로 그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 사고이후 치료용 로봇이 그에게 '진통제'를 준다. 5일밖에 못 살 정도로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능인데 정작 그 진통제는 '너무나' 강력해서 죽는 날까지 일상적인 활동이 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그 진통제야말로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가정하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그야말로 '궁극의 약'이 아닐까? 영화 '전우치'에서 등장하는 대사 '죽는 게 뭐가 두려운가요.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두려운 거지'가 잘 말해주듯이 대부분의 인간은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들, 즉 육체적 고통이 두려운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엔 유한한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여야 하는 각종 '퇴행현상'들도 있겠지만 그것들 역시 종국엔 고통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결국 같은 의미가 아닐까? 


그렇다면 너무나 치명적인 방사능이어서 단 5일밖에 못 살 정도지만 그 5일동안 큰 고통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줄 정도로 강력한 진통제야말로 내가 보기엔 '궁극의 의약품'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과학의 마지막 종착지가 영원한 삶이 아니라면 말이다. 


2.

두번째로 흥미로웠던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엘리시움의 시스템이 재부팅되면서 엘리시움이 아닌 지구에 거주하는 사람들조차도 엘리시움의 시민들로 인식하게 되는 장면이다. 흔한 히어로물의 흔한 스토리처럼 소수의 헌신과 한 명의 희생으로 사실상 무혈혁명이 성공한 셈인데(주1) 이어지는 장면에서 재부팅으로 인해 재프로그래밍된 엘리시움의 시스템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새롭게 시민으로 등록된 이들을 위해 의료 셔틀을 출발시키고 의료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앞선 장면에서 엘리시움이 가진 의료능력은 간단한 스캔기능을 갖춘 것처럼 보이는 기계가 스캔을 통해 진단과 치료를 동시에 하는 장면에서 잘 묘사된다. 다발성 복합골절부터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까지 심지어 총상으로 얼굴 대부분이 날아가 버린 이의 얼굴을 멀끔하게 다시 재생시키는 수준이다. 아무튼 그렇게 발달된 의료기술을 갖춘 의료셔틀이 가장 먼저 지원을 위해 지구로 발사된다. 


이 영화는 2013년에 개봉한 영화다. 이전에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가 상영되었고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이 벌어졌으며 최근엔 실리콘 밸리로 대표되는 부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시위도 있었다. 그리고 재선당시 오바마가 강력하게 추진을 예고했던 '오바마 케어'가 정치판의 핫이슈가 되기도 했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영화에서 묘사된 장면들이 묘하게 겹친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주1)

심지어 이런 패턴은 개인적으로 싸이파이물의 전설적 반열에 오른 '매트릭스'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 물론 그와 비슷한 패턴을 보이지만 '소수의 희생'이 강조되는 만큼 주인공의 바보짓도 그 수준에 이르는 이야기 전개탓에 한 편으론 민폐 주인공 영화의 대표처럼 알려진 '반지의 제왕'에선 조금 다른 형태로 볼 수 있다. 


주인공인 프로도의 바보짓에 나를 포함한 많은 관객들이 분통을 터트리다 못해 절대반지를 파괴하는 장면에서 '프로도도 같이 죽어버리라'는 분노에 찬 일갈을 내뱉기도 하지만 사실 영화에서 빠져나와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건 프로도의 의지가 아니라 절대반지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프로도에게 가해지는 비난은 분명 억울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자면 영화상에서 절대반지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거의 없고 대부분 '그러하니 믿으라'라는 식으로 처리된 것도 이런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데 크게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절대 반지가 그 이름에 걸맞을 정도로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잘 드러났다면 관객들도 프로도의 민폐행위들을 잘 이해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