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이야기는 재미없다. 게다가 그것이 단순한 설전이나 인신공격이 아닌 경우엔 더 재미없다. 그리고 머리가 아프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건들에 대해서 <사유>하는 것이고 해야만 하는 것이다. 정치가 사람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경우, 적어도 한 쪽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며, 불행히도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들이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을 규정짓는 '법'이란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법'이란 만들기는 쉬워도 허물거나 바꾸기는 어렵다. 지금 머리가 아픈 것이 나중에 머리와 몸, 게다가 마음까지 아픈 것보다는 낫다.
'뉴라이트'와 '뉴레프트' 대한민국의 아침을 여는 일간지들의 논설위원들중 자못 중립인 척하는 사람들은 이 현상을 두고 대한민국의 이념의 지평이 넓어졌다며 환영의 의사를 밝혔다. 나아가 그들은 이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소모적이었던 이념논쟁에서 벗어나 정책과 같은 구체적인 사안을 다룰 것이라는 적극적인 희망의 피력부터 갈등의 완충지점이 마련되었다는 다소 소극적인 해석까지 내렸다.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그들의 등장을 하나같이 반긴다는 표현인 셈이다. 언뜻 보기에 그저 나라의 안외를 걱정하는 듯한 이 겸손한 말투. 과공비례라고 했다. 지나친 겸손은 예의가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이건 지나치다.
실제로 일간지 논설위원들의 예의는 도가 지나쳤다. 그들은 마치 진정 새로운 사상을 지향하는 집단이 등장한 듯 말하지만 과연 그럴까? 요번에 뉴라이트 단체에서 교원단체를 꾸렸다고 한다. 하필이면 개정 사학법으로 예민한 이 시기에 다른 단체보다도 먼저. 그리고 그 단체에서 표방하고 발표한 것들을 여기저기서 읽고 보았다. 그래서 도달한 결론은 '라이트'인 것은 인정하겠는데 과연 무엇이 '뉴', 즉 새롭다는 것인지는 알수가 없었다. 개정 사학법에 대해 반대입장을 보이고 있는 각종 보수단체들과 다른 견해는 없다. 심지어 그들은 '사립학교'가 아닌 '교육의 공공적인 성격'에 대해서까지 부정하고 나섰다. 무엇이 '뉴'한 것일까?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는 '뉴'한 라이트들의 단체가 아니라 사실상 스스로를 자가복제해 나가는 수구세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들의 행보가 증명하는 바는 그렇다.
'뉴레프트', 뉴라이트에 비하면 이들이 받는 주목은 해와 달쯤의 차이가 있다. 보수를 넘어 수구를 지향하고 있는 이들이 아직도 힘을 발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이념지도상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 와중에도 몇몇 군데에서 이들을 다룬 글들이 있어서 찾아 읽어봤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떤 뉴'인가하는 의문이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서구의 뉴레프트 운동은 68혁명으로 상징되는 소수자의 인권, 환경문제를 일컫는 것이며 이는 이미 서구에서 일정 정도 실패한 것이므로 그것과 다른 '제 3의 길'을 모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게 뭘까? 아니 그게 과연 올바른 인식일까?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뉴'한 '레프트'의 운동은 다름아니라 소수자의 인권과 환경문제다. 이 둘의 범위는 매우 협소해 보이지만 그동안 레프트들이 추구해온 모든 이상들이 한꺼번에 담겨진 비빔밥과 같은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소수자의 인권과 환경을 인식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과거 우리가 겪어온 수많은 정치경제적 문제들에 대해서 틀린 해석을 내놓은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소수자의 인권과 환경문제는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와 산업사회의 몸인간성을 한꺼번에 비판하며 넘어서고자 하는 그야말로 날이 퍼렇게 선 운동인 것이다.
그것을 실패했다라고 간단히 말해버리는 것은 분명한 오류이며 사실상 '레프트'이기를 포기한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새로운 문제 설정을 무시한 레프트의 미래는 사실 투항밖에 없다.
전혀 '뉴'하지 않은 단체들이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 제대로 된 싸움은 아직 해보지도 못했는데 지레 질려버린 겁쟁이 어중이 떠중이들 수준은 아니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