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집회의 폭력성을 둘러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하면 편파적인 언론보도가 많이 줄었고 그런 언론사들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팽배해 있는 상황이라 예전처럼 긴박하게 진행되지는 않고 있는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집회의 폭력을 둘러싼 논란의 쟁점은 과거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도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폭력성을 우려한다는 집단들의 의견자체가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편파적이라는 점이다. 무언가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몇만 이상이 모인 집회이고 이미 그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경력이 있는 공권력이 여전히 당시와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시위대의 폭력성만을 제기하는 것은 편파적이다.
심지어 그들은 과거 꼴통언론사들이 단골메뉴처럼 들고 나왔던 집회의 폭력성이 대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란 말까지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언명이 그럴싸해 보인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폭력성의 역설'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실제로 그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은 '안전'이고 '안정'이다. 이 두가지를 담보해줄 수 있다면 굳이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공원 노친네들'이 안정적으로 경제가 성장했던 다까끼 마사오 시절이나 물가가 안정적이었던 빡빡 대머리시절을 '좋았던 옛날'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좋았던 옛날'의 경제상황이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와 3저 호황이란 대외적인 여건, 그리고 대다수 노동자들의 노동력 착취를 통한 성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은 항상 잊혀진 채로 말이다.
'폭력성의 역설'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좋았던 옛날'의 경제가 어떤 여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성장해왔는지를 무시하는 것처럼 폭력 역시 어떤 계기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 관심도 없다. 결과로서의 폭력, 그 자체에만 주목할 뿐이다. 단순하고도 단순한 인지방식이며 비판을 넘어 비난받아 마땅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런 이유로 욕을 한다고 한들 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내가 보증한다.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왔고 발전할 것이다'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비관적인 소식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설은 존재한다. 사람들이 폭력에 대해 이토록 즉자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면 상황은 악화를 넘어 비극으로 발전할 것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폭력에 대한 무감각'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실제로 존재한다. 바로 '전쟁'이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기에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든 막아야만 하는 현실적인 절대 악,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폭력에 대해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매우 희망적인 반응인 셈이다.
'폭력'과 '폭력성'에 대한 사람들의 이 이중적인, 그러나 그다지 모순될 것없는 반응. 이 역설에 인류의 희망과 발전방향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폭력성을 우려한다는 집단들의 의견자체가 겉보기와는 달리 매우 편파적이라는 점이다. 무언가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몇만 이상이 모인 집회이고 이미 그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한 경력이 있는 공권력이 여전히 당시와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시위대의 폭력성만을 제기하는 것은 편파적이다.
심지어 그들은 과거 꼴통언론사들이 단골메뉴처럼 들고 나왔던 집회의 폭력성이 대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란 말까지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언명이 그럴싸해 보인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폭력성의 역설'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실제로 그보다 더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은 '안전'이고 '안정'이다. 이 두가지를 담보해줄 수 있다면 굳이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공원 노친네들'이 안정적으로 경제가 성장했던 다까끼 마사오 시절이나 물가가 안정적이었던 빡빡 대머리시절을 '좋았던 옛날'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 '좋았던 옛날'의 경제상황이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와 3저 호황이란 대외적인 여건, 그리고 대다수 노동자들의 노동력 착취를 통한 성장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은 항상 잊혀진 채로 말이다.
'폭력성의 역설'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좋았던 옛날'의 경제가 어떤 여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성장해왔는지를 무시하는 것처럼 폭력 역시 어떤 계기로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 관심도 없다. 결과로서의 폭력, 그 자체에만 주목할 뿐이다. 단순하고도 단순한 인지방식이며 비판을 넘어 비난받아 마땅한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런 이유로 욕을 한다고 한들 그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내가 보증한다.
'인류의 역사는 발전해왔고 발전할 것이다'라는 믿음과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겐 비관적인 소식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설은 존재한다. 사람들이 폭력에 대해 이토록 즉자적인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면 상황은 악화를 넘어 비극으로 발전할 것이란 점에 주목해야 한다. '폭력에 대한 무감각'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실제로 존재한다. 바로 '전쟁'이다.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기에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든 막아야만 하는 현실적인 절대 악,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폭력에 대해 즉각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매우 희망적인 반응인 셈이다.
'폭력'과 '폭력성'에 대한 사람들의 이 이중적인, 그러나 그다지 모순될 것없는 반응. 이 역설에 인류의 희망과 발전방향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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