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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앨리스의 성취

The Skeptic 2013. 1. 28. 23:42

청담동 앨리스가 끝났다. 초반부는 흥미로웠지만 중간부는 지루했고 마지막 부분은 조금 어색했다. 그래도 이 드라마가 보여준 미덕은 상당한 편이었다. 드라마가 종영되었으니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풍성할 것이다. 나도 거기에 수저 한번 얹어 보련다. 


이 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복권을 떠올리면 된다. 나는 매주 로또를 산다. 로또가 시행된 이래 단 한주도 빠뜨린 적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알다시피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물론 최근에 로또가 팔려나가는 방식을 분석한 어느 수학자가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지만 1등이 나오지 않을 확률도 제로에 가깝다'라는 재미있는 결론을 발표하긴 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사실은 내가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로또를 산다. 매 주 잊어버리지도 않고 말이다. 왜? 제로에 가까운 그 확률에 기대를 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기대란 것이 복권 중독이란 증상을 보일 수준은 아니다. 청담동 앨리스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아주 단순화시키면 이런 것이다. 물론 드라마가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가장 큰 미덕은 드라마 초입부에 사람들이 기대했던 전형적인 캔디 스토리를 부정한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이 부정이 단순히 한세경이란 인물에만 해당된다면 사실 그저 그런 드라마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영웅주의 서부극이란 전형을 만들어 가던 시절 그 전형적인 서부극의 명배우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스스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를 만듦으로서 고전적인 영웅주의 서부극을 부정했던 것은 대단한 영화적 성과지만 그 작품이후로 나온 비슷비슷한 영화들이 그 영화의 미덕을 넘어서지 못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 청담동 앨리스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복수를 위해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갈구했던 차승조란 인물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드라마에서 정형화된 캔디만큼이나 아주 흔하게 등장하는 그렇고 그런 각잡힌 인물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작가들은(김지운, 김진희) 아주 쿨하게 그 인물에 대해서도 '꿈깨라'고 일갈한다. 고작 가난하고 고만고만한 화가의 작품을 무려 3천만원이란 거금을 주고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있다면 그건 당신과 특수관계인(드라마에선 돈많은 아버지)일 것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보여준다. 


조금 곁다리같은 이야기지만 이건 아주 시사점이 많은 대목이다. 특히 차승조가 그런 가능성 자체를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있다는 대목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최근 대선에서 모 후보의 선거위원장을 맡았서 인삼쿠키라는 말을 히트시킨 철딱서니없는 인물, 가방만드는 회사에서 사장질하는 아줌마가 그러더라. 자기는 부모님 도움없이 성공했다고. 그런데 정작 그렇게 성공하기 위해 투자했던 그 많은 비용들을 스스로 벌었다는 것은 증명하지 못 하더라.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식인 거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고 남의 입장에 대해서 신경쓰며 살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둘러싼 환경밖엔 모른다. 그리고 그 기준에서 판단하는 거다. 자수성가한 아버지 밑에서 남부러울 것없이 큰 자손들이 안하무인으로 묘사되는 것도 그럴만한 충분한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인물은 바로 서윤주다. 그는 성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로 등장한다. 물론 극 중반 한세경과의 이상한 파트너쉽을 맺는 장면을 통해 서윤주가 본인의 장담처럼 완전히 검은 인물은 아닐 수도 있다는 암시를 던져주는 것으로 이 등장인물에 대한 결말 부분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완전범죄를 꿈꾸는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자신의 범행이나 수법을 다른 이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많은 이들에게 이미 다 알려진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만약 그런 경우가 닥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런 방법을 썼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서윤주는 그런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다.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다. 


그런 서윤주가 '꿈에서 깨는 순간'은 그 녀에 대한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즉 그 녀가 청담동으로부터 밀려나게 된 순간이 아니라 자신만이 세상 사람들을 속이면서 완전범죄를 성공시켰노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은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즉 남편으로부터 망친 사업을 성공시켜놓든가 아니면 이혼이라는 선택을 강요받은 순간, 즉 자신만이 남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도 자신을 이용할 수 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용을 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그 녀가 꿈에서 깨는 순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자비하게(?) 사람들의 꿈을 깨어놓음으로서 이 드라마는 정형화된 드라마의 틀을 깨는 또 다른 정형화된 드라마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런데 항상 새로운 시도는 댓가를 치루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댓가가 바로 드라마의 미지근한 결말 부분이다. 물론 그런 시도들이 등장한 드라마의 결론은 대충 그런 식으로 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나는 본다. 누군가는 '캔디 스토리를 부정할 것 같으면 더욱 철저하게 부정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마지막 부분에서 차승조와 한세경이 연결되는 것은 너무나 로맨틱 코미디물에 정형화된 고루한 결말이다'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미 누군가는 그런 주장을 햇을 거다. 


자신이 처한 물리적 환경에 의해 형성된 계급의식은 절대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기계적이고 고리타분하다 못해 폭력적인 계급관을 머리에 처박고 사는 인간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계급의식이란 한 개인이 어떤 환경에 처해있는가도 중요하지만 다른 환경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이해도와 공감능력에 따라 사뭇 달라질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한세경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 차승조가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못 할 것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고 변화하는 존재니까. 


심지어 한세경과 차승조가 재결합하는 장면에서 두 주인공의 대사사이에 속마음들이 나래이션으로 표현되는 장면을 보자. 사랑이야말로 절대적인 가치라고 주장하는 로맨틱 코미디물은 이렇게 구구절절이 사랑에 대해서 태클을 걸어가며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는다. 그냥 사랑은 증명할 수 없다는 말 한마디와 뜨거운 포옹 한 번이면 이야기는 엔딩이다. 그런데 작가들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런 점들을 고려해보자면 난 대체로 무난하고도 만족스러운 결론이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사람들의 평가는 그렇게 후하지는 않을 것 같다. 



P.S.

그래도 '신사의 품격'의 결말부분보다는 낫다. 

그리고 박시후의 연기력. 미안하지만 난 그 배우가 연기를 잘 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 했다. 아주 엉망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연기를 잘 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냥 평범한 수준이었다. 몇 번인가 말한 바 있지만 난 유별난 상황을 잘 소화하는 것을 보고 '연기를 잘 한다'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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