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교보문고에서 인터넷으로 책을 사느라고(50% 할인을 해준다고 해서) 회원가입을 해놓았더니만 일주일에 2번은 책사라고 메일이 날아오는 것 같다. 내 기준에서 보자면 별 가치없는 정보와 상술이라 그냥 보내는 편이지만 간혹 괜찮은 것들(50%할인해준다는)이 있긴 하다. 살만한 것들도 있지만 간혹 책을 살 필요성까지는 못 느끼겠는데 소개글이 흥미로운 경우들도 있다. 이번에 날아온 메일도 그랬다. 카뮈와 사르트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란다.
그 소개글을 보자면 이렇다.
"20세기 지성계의 두 거인 사르트르와 카뮈의 논쟁사『사르트르와 카뮈』. 사르트르와 카뮈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에 만나,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 출간되던 1951년까지 돈돈한 우정을 쌓았다. 카뮈는 이 책에서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는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개념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사르트르는 <현대>지를 통해 카뮈를 ‘현실적 갈등과 동떨어져 있는 지식인’으로 규정했다. 이에 대해 카뮈는 사르트르를 포함해 ‘역사의 방향으로 의자를 놓지 못한 자들’이라며 재차 비난했다. 이후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는 단절되었다. 이 책은 ‘자유’의 문제와 ‘악’ 앞에서의 ‘책임’ 문제에 대해 일치했던 두 사람의 견해가 냉전과 더불어 확연히 갈라지는 전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고 있다. 저자 로널드 애런슨은 특히 지배계급에 대한 사르트르의 투쟁과 기독교적 휴머니즘 쪽으로 경사된 카뮈 사이의 극복 불가능한 거리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덧붙이는 소개글을 보면 이렇다.
"이 책은 20세기 프랑스 지성계의 두 거인 사르트르와 카뮈의 우정과 결렬과정에 대한 재탐사이다. 지금까지 이 두 거인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해서는 정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견해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사르트르의 의견에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애런슨은 이 책에서 이 같은 견해를 뒤집고자 한다. 즉, 카뮈의 정치, 사회적 사유가 사르트르보다 오히려 더 현실에 가깝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사르트르와 카뮈의 관계에 대해 수정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난 개인적으로 사르트르나 카뮈에 대해서 잘 모른다. 아마도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앞으로도 별다른 관심을 갖게 되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 짚고 있는 주제는 꽤 관심이 간다. 기본적으로 내 견해 역시 뒤에 덧붙인 소개글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카뮈가 기독교적 휴머니즘 쪽으로 경도되었다는 발언때문이다. 대체로 종교적 휴머니즘이 가지는 결정적인 한계란 문제의 근원을 개인의 탓으로 단순하게 치환해 버린다는 점이다. 개인보다는 사회구조가 우선하며 달걀보다는 닭이 먼저라는 견해를 갖고 있는 내 입장에선 수긍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사건들부터 전 세계적인 사건들까지 모두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고 그 사건들을 통해 반성하고 고민하는 지성인이 된다는 것, 분명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과연 몇 명이나 그런 과정을 겪었으며 나름의 성과를 내놓았는가를 반문해보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의식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방식을 통해 사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는 일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난 희박할 것이라고 본다. (희박하고 어려운 만큼 일단 어느 정도의 성취를 이루기만 하면 다른 무엇보다 강고한 신념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대부분의 현실 종교가 보여주는 모습 역시 현실과 현실속의 인간들이 원하는 것들과는 상당한 괴리감을 보여준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이미 증명된 사실이지만 종교가 수행하는 역할이란 그저 서로 자기가 믿고 싶어하는 것들만 무한반복하고 상호복제하는 과정을 통해 폐쇄적이고 퇴행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이 대부분이다. 즉 개인의 안위와 평화라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집단적인 문제들에 관한 한 종교는 도움은 커녕 민폐만 끼치는 역할을 해왔을 뿐이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고 정치적인 지향도 갖추었던 카뮈가 왜 그런 양상을 보였을까? 이 부분은 사르트르와 '현실'공산주의에 대한 시각 탓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익히 잘 알려졌다시피 러시아에서 일어나 볼셰비키 혁명은 엄밀한 의미에서 마르크스가 언급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민중들이 요구했던 것은 자신들이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짜르 독재체제가 아닌 자신들을 위해 일해주는 새로운 정치 지도자 내지는 정치 세력이었다. 즉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것이다.
구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늘상 힘든 일이지만 특히 사회구조가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권력집단이 변화하는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사회구조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은 경우엔 여전히 구시대의 질서가 뿌리깊다는 의미고 이 질서는 새로운 권력집단에게 상당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우리의 근현대사에 수많은 시민 혁명이 기록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한 권력을 잡은 집단은 필연적으로 폭력적인 수단에 의존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폭력적인 수단의 강도는 과거의 질서가 얼마나 뿌리깊은가에 따라 비례할 수 밖에 없다.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이후 소련의 수립과 냉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현실 공산주의의 대표주자였던 구소련이 폭력적인 국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노파심에서 짚고 넘어가자면 그렇다고 미국이 비폭력적이었던 건 아니다. 미국 역시 소련만큼이나 폭력적인 국가였고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대체로 민주주의와 개인주의, 반독재라는 가치를 공유했던 이 둘이 결정적으로 갈라지게 된 계기 역시 이런 역사적 사실때문일 것이다. 카뮈는 구소련으로 상징되는 과도한 국가폭력에 대한 반감에 방점을 찍은 반면 사르트르는 그런 폭력이 피치못할 선택이란 점에 더 무게를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카뮈나 사르트르의 견해나 모두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난 사르트르의 견해에 대해서 어느 정도 동의한다. 구시대의 질서를 신봉하는 지배집단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내줄 의사가 없다. 문제는 지난 세기에 이들이 그런 견해를 표출하기 위해 선택한 것이 극악한 폭력이었다는 점이다.(지금도 우리 나라에서 자칭 보수주의자라는 이들이 보이는 폭력성을 보라) '혁명의 세기'로 불리우는 20세기의 역사는 사실 구시대의 질서를 지키려는 세력들의 대량 학살과 그에 맞서는 세력들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난 구시대의 지배집단이 행하는 폭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폭력을 선택하는 행위를 나쁘다라고 보지 않는다. 그건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생존의 문제고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급격한 변화가 초래한 대중적 불안, 그리고 그런 불안정한 감정상태에서 파생된 판단력 상실이 부른 광기의 역사가 잠잠해지는 시기가 도래한다면 폭력을 선택가능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시각은 반드시 버려야만 한다. 몇 번 강조한 바 있지만 폭력이야말로 불안과 판단력 상실, 광기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카뮈의 시각은 원론적인 차원에서 옳고 사르트르가 보여준 시각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판단으로 가장 적절한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더 심오한 내용은 책을 읽어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반값이라니 내 또 질러준다.
p.s.
그런데 이 책을 사자니 예전에 그린비 출판사에서 나온 비슷한 책이 더 나아 보인다. 갈등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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