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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와 사르트르. pt.2.

The Skeptic 2013. 4. 16. 17:25

pt.2 이긴 하지만 카뮈와 사르트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은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최근 내가 자주 거론하는 '폭력'과 관련된 이야기다.         


이전 글에서 난 사회구조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급격한 변화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지적을 한 바 있다. (그렇다고 그런 전제조건이 갖추어진다고 해서 변화가 쉽다는 건 아니다. 변화는 주변 여건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무척 힘든 일이다) 그리고 그런 취약성때문에 많은 변화 시도들이 폭력적인 양태로 흐르거나 혹은 폭력적인 반발을 불러오고 그 결과 대립했던 두 세력의 뿌리깊은 반복과 질시를 만들어내며 그것이 다시 변화를 방해하는 중대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사실 이 단계에 이르면 이미 변화는 물건너간 것이나 마찬가지고 결과적으로 구시대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이 승리한 것과 다를 바 없어진다. 우리의 경우만 해도 아무런 의미도 근거도 없는 지역주의와 반민주주의적인 좌파에 대한 마녀사냥이 결과적으로 친일파로부터 이어진 군부독재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바로 그 반증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평화로운 방식의 변화는 불가능한 것일까? 불가능하지는 않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도 있다. 노르웨이인지 스웨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북유럽의 어느 국가에서 산업구조의 변화로 인해 산업 공동화, 실업율 증가가 늘어나자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타협'을 이루었던 바가 있다. 즉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산업구조의 변화가 단순히 한 사회의 일부 계급에게 무조건 유리하다거나 불리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변화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각 계급의 사람들이 모여 타협을 모색한 것이다.                      


이건 매우 타당한 진행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사회구조의 변화라는 건 단순히 그 사회의 일부 계급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단지 그 변화의 여파가 '부정적으로, 혹은 긍정적으로 나타나는가?' 아니면 '제한적인가? 전면적인가?'라는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심지어 그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결국엔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주로 중남미에서 벌어지고 있는 '납치 사건'들이 그런 경우다. '납치'는 몸값을 노리고 벌어지는 범죄고 일반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할수록 빈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해져도 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부자들이라고 해도 그 결과 사회적 불안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들로부터 자유롭긴 힘들다. 물론 그 나라를 떠나면 문제가 해결될 테지만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만큼의 부자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이런 방식을 통해 문제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해결될 것이라곤 보지 않는다. 다만 당장의 비극을 막을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앞으로도 괜찮은 해결방식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성과다. 문제는 이런 모범답안들이 준재함에도 불구하고 왜 현실에선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사실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며 이미 수 차례에 걸쳐 지적해온 문제기도 하다. 좌파를 절대 악으로 취급하는 것이 그런 예다. 절대 악이란 건 사실 그 자체로 존재할 수도 없지만 알다시피 인간은 상상력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그 존재를 믿을 수도 있다. 문제는 절대 악이란 존재는 대화나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그야말로 척결의 대상이란 점이다. 앞서 언급한 사례를 봐도 만약 좌파나 우파가 다른 정치적 지향을 가진 이들을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대타협같은 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죄는 미워하된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타당성을 얻는 것이다. 



p.s.

그래서 최근 여러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근본주의 종교에 기댄 각종 정치적 행위들이 사실상 아무런 대책도 안 되는 것이다. 노파심에서 한 마디 더 하고 넘어가자면 흔히 이슬람에 대해 이런 표현들을 사용하지만 인류의 과학적 성취나 성적 소수자, 특정 정파를 절대 악으로 치부하는 일부 개신교들 역시 근본주의 기독교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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