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제란다. 그런데 난 왜 화제인지 의문이다. 특히 남한 언론들이 그를 '극좌'라 지칭하는 것이 가장 의아하다. 그가 내놓은 공약이라고 해봐야 고작 신자유주의의 대표주자였던 대처 이전 상태로 돌려놓겠다는 것일 뿐인데 말이다. 고작 그 정도 수준을 극좌라고 지칭할 수 있단 말인가?
남한 사회의 정치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협소한가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는 바지만 이건 좀 심하다. 물론 그렇게 된 이유는 영국과 미국을 필두로 한 영미권 정치판에서 좌파를 자처했던 이들이 '제 3의 길'이란 미명하에 사실상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결과긴 하다.
고로 질문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투항한 토니 블레어 같은 이들을 좌파라고 불러야 하는가? 제 정신이 박힌 이들이라면 그런 짓은 안 할 거다. 토니 블레어의 등장이후 영국 정치판은 우리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처럼 사실상 큰 변별점없는 두 정당이 상호 이득이 되는 선에서 대립하는 척 쑈를 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토니 블레어 이후 영국의 노동당은 집권이 목표일 뿐 집권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은 사실 없었다. 외려 이번에 당선된 제리미 코빈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영국 정치판은 비로서 제대로 된 좌우파의 정치 경연장이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
극좌. 도대체 난 무엇을 기준으로 극좌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건지 도통 납득할 수가 없다. 하다못해 코빈이 막스 할배가 언급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도 주장했다면 모르겠다만 코빈은 그런 말 한 적없다.
게다가 이미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 주장은 현실에서 사문화되기도 했다. 개인적인 견해로 보자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항목이 가지는 유효성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보지만 방법적인 면에서 볼때 굳이 그런 방식을 따르지 않아도 달라질 것은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는 점은 인정한다.
막스 할배가 그런 방식은 언급했던 시절은 신분제 사회라는 틀덕에 극소수의 기득권 세력이 모든 권력을 소유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권력을 시민권력으로 만들기 위해선 그런 방식이 필요했던 것 뿐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형식적인 차원의 민주주의가 안착화된 나라에선 구태여 그런 방식을 따르 필요가 없다. 형식적으로나마 국가 권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상태니까.
영국 좌파가 그런 것조차 무시할 정도로 현실인식이 박약한 것도 아니고 이미 언급한 것처럼 고작해봐야 대처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는 걸 극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제레미 코빈을 극좌라 부르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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