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Media

가장 빛나는 순간.

The Skeptic 2013. 6. 4. 01:11

대개 모든 사건들엔 가장 빛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 사건이 100개면 100개의 빛나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물론 인간과 인간이 만들어낸 그 모든 것들은 주관성들의 향연이기 때문에 똑같은 사건을 보면서도 빛나는 순간이 어디쯤인지에 대한 시각은 또 서로 많이 다를 수도 있다. 


보편성과 주관성에 대한 논쟁은 끝도 없이 이어질 테지만(물론 그 이유는 대부분 무지에서 기인하지만) 확실한 건 구체적인 사건들 앞에선 이런 논쟁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이 수준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사건에 대한 내 시각과 그 시각이 어떤 이유로 성립하는가란 설명과 증명만이 유의미할 뿐이다.(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이런 점을 통해 우리는 보편성과 주관성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심심해서 '신사의 품격'을 다시 봤다. 처음부터 전부 다 다시 본 것은 아니고 그냥 중간 에피소드 몇 개를 다시 본 것이다. 이렇게 드문드문 찾아볼 때마다 꼭 찾아보는 부분이 있다. 바로 15회 에피소드에서 김도진(장동건)의 옛날 연인인 김은희(박주미)와 서이수(김하늘)가 만나는 장면이다. 


내 시각에서 보자면 아마도 이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결정적인 장면들중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다른 결정적인 장면들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 있다. 대체로 트렌디 드라마(40대 아저씨가 등장하는 트렌디 드라마라는 이질감은 논외로 하고)들의 경우 이런 장면을 빛내는 것은 바로 통통 튀는 대사다. 


여름 블록 버스터의 주류라고 할 액션 SF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바로 화려한 CG로 무장한 액션장면인 것처럼 트렌디 드라마의 핵심은 이런 대사다. 그런데 이 부분의 대사는 정공법의 대사들이다.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그런 대사가 아니고 그냥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대사들이다. 그런데 묵직하다. 심지어 구구절절이 서로의 사정을 늘어놓거나 일일이 합리화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사전에 우리는 이 드마라가 트렌디 드라마이며 따라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일반적인 사람들,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상적이며, 사실을 따지기보다는 감정을 먼저 앞세우고, 사리분별보다는 이득을 먼저 챙기려드는 그런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래서 이런 장면 연출이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보아 넘기기엔 이 장면은 너무나 이상적이다. 그래서 난 매우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빛나는 장면이라고 본다. 


그리고 바로 이 이해와 화해라는 중요한 덕목들이 강조되는 이 장면의 주인공들이 여성이란 점도 빛을 내는 중요한 요소라고 본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드라마에서 표현한 도식적인 방식에 의거하자면 이런 류의 이해와 분별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드라마에선 그토록 이해심많고 현명한 남자들이 왜 현실에선 늘상 치정살인의 가해자로 등장하는 걸까?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하늘의 뜻이라고 술자리에선 그렇게 떠들어 대면사도 정작 그 일이 자신에게 닥치면 하늘의 뜻이고 자시고 분노에 몸과 마음을 온통 내 맡기는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반면 최악의 순간이 닥쳐도 최악의 상황만은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대부분 여자들이다. 단언컨데 일반적인 경우 가장 현명한 쪽은 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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